정치학자 최정운은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80년 오월 광주를 절대공동체라 명명한다. 네 것 내 것도 없이 서로 나누고 나눠쓰며 목숨도 내 것 네 것이 없는 것을 체험해버린 사건이라는 것이다.
공수부대의 학살과 만행이 시작된 5월 18일 오후부터 20일 자정, 그리고 21일 새벽까지의 시간이 그 정점이다. 피투성이가 된 젊은이들을 보호하고자 뛰어들었다가 본인마저 머리가 깨지고 대검에 찔리면서도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잠시 흩어졌다가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20일 밤은 마치 사람들이 어디 체육관에 서커스 구경하듯이 도청을 목표로 너도나도 몰려나왔다. 일말의 두려움도 섞여있지만 의기양양함이 묻어나는 군중의 행렬이었다. 수 십 만 명이 도청을 중심으로 방사형태로 거리와 거리를 가득 채웠다. 무엇이 이들을 의기양양하게 만들었을까.
18일 오후 금남로 거리는 아수라장이었다. 수 백 명의 젊은 학생들이 거리를 내달으며 계엄령을 해제하라고 외쳤지만 단발마의 비명과도 같았을 뿐 총을 둘러메고 묵직한 방망이를 든 공수부대에게는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들의 만행은 남녀노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택시기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승객 중 젊은 사람이 타고 있으면 끌어내려 무자비하게 몽둥이질과 군화발길을 퍼부었다. 그걸 말리는 택시기사에게 강력한 폭력이 이어졌다. 대검으로 찔러댔다. 정지명령을 어기고 승객을 빼돌리는 기사는 곧장 초죽음이 되었다. 택시기사 정영동(당시 28세)의 증언을 들어보자.
“5월 19일 오후에 젊은 승객 3명을 태우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옆을 지나는데, 공수 십여 명이 차를 세우더니 택시에 타고 있던 승객을 끌어내려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나에게 ‘이 자식도 데모하는 학생을 싣고 다니니 똑같은 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마구잡이로 휘두른 곤봉에 맞아 정신을 잃어버렸다.”
공수부대원은 지켜보기만 하는 택시도 그냥 두지 않았다. 차 트렁크와 차체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쳐서 망가뜨리고 착검한 채 차 옆문을 찔러대며 운전수들을 끌어내려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겨 팼다. 보다 못한 택시기사 이행기(당시 29세)는 적극적인 저항에 나선다. 승객을 태워 피신시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광주시민을 모조리 죽이러 온 계엄군에 맞서 싸워야지 운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구동성으로 택시기사들은 “공수부대가 우리를 곤봉과 대검으로 살해하고 있는데 영업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우리도 싸워야 한다.”며 무등경기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광주역을 거쳐 시외버스터미널을 경유하여 금남로로 차를 몰았다. 곳곳에서 공수부대가 저지하였지만 200여대의 차량 대열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맨 앞에는 버스가 서고 그 뒤를 트럭이 따랐으며 차량은 모두 헤드라이트를 켰다.
한편 계속 불어나는 시민들의 시위에 압도당한 공수부대는 외곽의 진압을 포기하고 도청 앞에 포진하였다. 마침내 오후 6시가 넘어 차량시위대가 금남로에 등장한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일시 주춤했던 시민들은 다시 금남로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밤새 공부수대와 접전을 벌인다. 공수부대는 당황하였다. 금남로에 몰려든 시민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시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는 이 날 밤의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런데 나는 우리의 대표적 민요 아리랑이 갖는 그토록 피 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방송국, 파출소 등이 불타 도청 앞 광장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피 속에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전율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최정운이 명명한 절대공동체 광주의 정점을 이룬 것이 바로 택시기사들의 차량시위였다. 초동 작전이 먹혀들지 않자 초조해진 신군부에 맞서 광주시민들의 전면적인 저항을 이끌어 낸 것이 택시시위였던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극한 폭력에 맞서 이웃과 한 몸이 되어 공동체를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체험했다. 그리고 하루 뒤 짧지만 승리의 기쁨을 맛본다. 도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자치공동체를 열어젖힌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새로운 장이 탄생하는 것이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다 할지라도 국민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아주 사소한 진리가 현현하였다.
한편 20일 차량시위와 더불어 택시 기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5월 항쟁에 참여한다. 신봉섭(당시 32세)은 19일 금남로 거리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시신을 보고 바로 항쟁에 뛰어들었다.
계엄군이 광주를 쓸어버리려고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역 앞에 모여든 차량 50여대를 이끌고 비아정류소로 가서 바리케이트를 쳤다. 다시 광주로 돌아와서는 아시아자동차(지금 기아자동차) 앞 도로를 지나는 공수부대 짚차를 공격하여 중위를 붙잡았는데 시민들의 분노에 찬 복수의 감정을 절제시켜 인근 병원에 옮기고 치료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21일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시내 치안유지를 위한 순찰과 시민군의 식량조달 등을 담당한다.
[망월묘지 옛5·18 묘역에 있는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 추모비. “죽으면 망월동에 묻어달라”고 밝힌 고인의 뜻에 따라 지난 2016년 이곳에 유품이 안장됐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김만섭은 서울에서 내려오던 길을 되돌아 가려다 눈믈을 흘리며 광주로 돌아간다. “아빠가 손님을 내려놓고 와버렸어. 손님을 데리고 가야 해”.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김만섭의 선택은 광주 택시기사들의 선택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이웃의 고통에 호응하며 온몸으로 저항에 나선 택시 기사들. 80년 오월은 참혹한 희생자만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김만섭’이 극단적인 국가폭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저항한 행위자의 역사이다.
힌츠페터는 살아생전에 광주에 간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나는 기자다’라는 한마디로 답변을 대신했다고 한다. 너는 왜 택시를 몰고 차량시위를 벌였냐 라고 물으면 그들 택시기사들은 한결같이 ‘사람이니까’라고 답한다.
오월 광주의 절대공동체는 수많은 ‘김만섭’이 만들어 낸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평범한 택시기사들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에돌지 않고 어떻게 정면으로 부딪치며 새로운 공동체의 한 장을 만들어가는 지를 영화의 한 장면으로 곱씹어보게 된다.
[시인 조진태(전 5·18기념재단 사무처장)]